디지털 기록의 허망함

Sep 7, 2016 • memory


들어가는 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었을 아내가 메시지로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연애 시절 내가 쓴 편지였다.

편지

지금보면 너무 오글거려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우리 부부는 그 내용을 가지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 일로 연애하는 2년동안 이벤트가 있으면 한번씩 적어둔 내 일기가 궁금해서 일기앱을 찾았는데 내가 알던 자리에 다른 앱 아이콘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이콘과 앱이름은 Flava였다.

Flava

그런데 왠 me.time인가?

Flava

여기서 식은땀이 한번 났다.

그리고 앱을 켠 뒤 정말 몇 초간 먹먹해졌다.

앱은 생소하 모습으로 변했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찌질함, 삭제하거나 삭제당하거나

20대 초 내 찌질함은 모두 싸이월드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DSLR 사진기를 가지던 시점에 블로그가 유행을 타서 그 시절 이후부터 연애가 시작될 무렵까지의 찌질함은 Paran 블로그에 있었다.

하지만 Paran을 운영하던 KTH가 서비스를 중단(2012. 07. 31)하면서 압축 파일 하나로 그동안 블로그에 쌓아둔 사진과 글을 받았다.

당시 다음으로 이전할 수 있게해주었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파일이 어디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첫번째 잊혀질 권리를 행사당하게 되었다.

엄밀히는 압축 파일 관리 소홀로 잃어버린 것…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유명무실해진 싸이월드를 스스로 접었다.

이로써 공개된 찌질감의 크기가 줄어 다행이고 젊은 날 무슨 미친짓을 했는지 알 수 없어 가끔 아쉽고 그렇다.

정말 지키고 싶었던 추억

후련함과 아쉬움을 극도로 상쇄시켜주는 것이 마침 시작된 연애였다.

시간이지나면 많은 것을 잊어버리니까 소중한 사람과 있었던 즐겁고 소소한 일상을 어떤 앱에 가끔 남겼다.

처음에 기록을 남기던 앱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금 불편했고 못 생겼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다 Flava를 알게되고는 내용을 하나하나 복붙하여 기록을 모두 옮겼다.

그 뒤에도 꾸준히 사용하다보니 연애때도 예전 기록을 꺼내보며 아내와 함께 오글거려 몸서리치던 일이 생기곤 했다.

Flava에 기록된 내용은 결혼식날 아내에게 읽어준 편지를 작성할 때도 인용할 얘기를 쉽게 찾을 수 있게해주었었다.

결혼 뒤에는 미래의 아이가 이 내용을 발견했을 때 세침한 눈을 뜨고 구토하는 모습을 흉내내며 힘들어할 것을 상상하곤 했었다.

돌에 음각 > 넘사벽> 종이 > 하드디스크

기술이 발전했지만 인류가 멸망하면 단 몇년만에 완전 못쓰게되는 것이 디지털 기기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과학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지만 여전히 돌에 음각을 하는 기록이 종이, 하드 디스크보다 월등히 오래간다는 얘기도 나왔다.

광개토왕릉비

그 얘기를 들으면서 멸망하지 않았으니 내 기록은 유효하겠지하며 흘러 넘겼고 돌에 음각을 할만한 명필은 아니니 상관없다고 했다.

그 때로부터 지금이 얼마나 지났을까?

6년전 기록조차 글자하나 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블로그의 내용도 읽을 수 없게 될 것이다.

malrang 측에 문의를 해놓은 상태지만 리뷰가 아래 상태인걸보면 답이 없는듯하다.

FlavaReview

우리는 어떻게 기록을 남겨야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서비스를 제작해야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서비스 종료되면 다시 할 수 없는 게임… 너무 아쉽다.


Flava 개발자분이 계시다면 부디 백업파일 해석방법이라도 알려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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